KIMS Periscope 제355호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과 연합 해군 작전
대한민국 해군(ROKN)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주도의 연합 해군 작전의 일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해군은 연안에서의 역량, 현지 지식, 사기를 바탕으로 연합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해군은 장비, 훈련, 통신, 지휘통제 등 신생 해군으로서 큰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해군은 아직 신생 단계였다. 해군은1945년에 설립된 조선해사협회와 1946년에 창설된 조선 해양경비대를 근간으로 발전한 조직이었다. 당시 6,624명의 수병과 35척의 함정으로 구성되었으며, 함정 대부분은 미국과 일본의 소형 소해정, 이후 최신으로 구입한 미국 구잠정 몇 척이 전부였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이 소규모 함대는 극적으로 확장되어 휴전이 체결될 무렵에는 14,000명 이상의 병력과 57척의 함정, 그리고 새로운 미국 초계함, 어뢰정, 상륙정을 갖추게 되었다. 전쟁 기간 미 해군 극동 사령관의 권한 하에 있었으며, 유엔 봉쇄 및 호위 부대 산하의 기동전대로 활동했다.
한국군은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북한 봉쇄를 위한 연합군의 노력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전쟁 후반에는 유엔의 해안 기뢰 제거 작전에도 투입되었다. 마지막으로 게릴라 공습, 한국 해안의 섬 전초기지 통제, 그리고 가끔 해안 포격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역할에서 한국군은 연합군에게 여러 중요한 이점을 제공했다. 첫째, 한국군은 연안 작전이 가능한 소형 함정을 제공함으로써 미국의 약점을 보완했다. 한국의 해안선은 험준하고 수심이 얕은 경우가 많아 거대한 미 해군 함정이 해안 가까이 접근하여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 해군의 함정은 대부분 가볍고 흘수가 상당히 얕아 미국이 운용하는 대형 수상 전투함과 비교했을 때 효과적이었다. 이는 다른 연합군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기동성은 여러 면에서 유용했다. 한국군 함정은 해안을 포위하고 있는 적 함정을 요격할 수 있어 유엔의 봉쇄작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군 함정은 해안에 더 가까이 접근하여 연합군 포격의 표적을 더 잘 식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해군은 해안이나 연안 섬에서 아군 게릴라 부대를 호위, 상륙, 보급 또는 대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전반적으로 험난한 해역에서 해안 가까이에서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한국 해군의 능력은 연합군의 해군 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할 수 있다.
둘째, 한국군은 연합군에 유용한 현지 지식을 제공했다. 현지 지형, 날씨, 인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한국 해군은 정보 수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한국 해군 요원들은 미군과 긴밀히 협력하여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였고, 종종 연합군 함정에 배치되어 피난민을 인터뷰하고 포로를 심문하며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셋째, 한국 해군 장병들은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다. 미 해군 장교들은 한국 해군 장병들이 제한된 경험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매우 자부심이 강하고 용맹하며 사기가 높았다고 자주 보고했다. 한 유명한 일화로, 전쟁 둘째 날 백두산함이 600명의 병력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북한군 수송선을 저지하였다. 거친 파도 속에서 수송선을 타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백두산함은 적 함정의 기관총으로 인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백두산함은 3인치 함포가 오작동하자 다른 무기로 적과 교전할 수 있도록 더 가까이 접근하였다. 결국 백두산함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용감한 작전으로 북한 수송선을 침몰시키고 부산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한국 해군은 이러한 강점을 가지고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첫째, 한국 해군은 낡거나 유지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제한된 장비로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해군 함대의 대부분은 상태가 좋지 않았고, 중요한 통신 및 항법 장비, 센서, 냉장 창고 및 기타 필수장비가 없는 오래된 미국과 일본 함정들이었다. 한국 해군 함정들은 잦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연합 작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다른 연합군 회원국들이 값비싼 수리를 대신 제공해야 했다. 레이더와 사격 통제 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한국군은 지상 교전에서도 전투 효율성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기뢰 제거 장비와 디가우징 장비의 부족은 연합군의 기뢰 제거 작전에 대한 한국군의 지원능력을 제한하였다.
둘째, 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 장병들은 충분한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다. 초창기 대한민국 해군 장교후보생은 해군사관학교에서 2년의 짧은 교육만 받았다. 또한 신병들은 명령에 따르고 규율을 지키는 기본 교육만 받았을 뿐, 그 외의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바다에서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고, 결국 이는 전투 내내 전술적, 기술적 실수로 인한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1950년 12월 흥남항에서 연합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피난민을 실은 국군 수송선이 전선에 부딪혀 파손된 끔찍한 사례가 있다. 이 배는 이후 수리되었지만, 곧바로 또 다시 뱃머리가 파손되어 출항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많은 난민들은 물과 식량이 절실히 필요했고, 재보급을 기다리던 중 몇몇은 사망했다.
셋째, 한국군과 연합군 간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양측간 심각한 언어 장벽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군 장교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장교는 거의 없었고, 미 해군 장교 중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장교 또한 거의 없었다. 연합군이 한국군 함정을 식별하고 인식하는 것도 때때로 문제가 되었고,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수차례 잘못된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50년 6월 29일, 미 해군 주노호는 삼척 인근에서 작전중인 한국군 함정을 발견했다. 주노호는 모든 한국군 함정이 북위 37도선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고, 해당 함정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주노함은 이 함정에 발포하여 함정을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한국 선원 8명이 사망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군은 전쟁동안 지휘통제에 혼란을 겪었다. 한국군은 유엔군사령부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이 체계가 항상 작전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본 어부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새로 선포한 한-일 해상경계선을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군의 지휘권을 유엔군사령부로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CTF 95를 우회하여 일본 어선 나포를 명령했고, 이로 인해 일본과의 심각한 외교적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며 미국이 이를 중재해야 했다.
우리는 연합 작전의 일환으로 소규모의 개발도상국 해군이 보여줄 수 있는 강점과 약점의 유형에 대한 사례를 대한민국 해군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유용한 연안 역량, 현지 지식, 치열한 전투 정신을 활용하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한 훈련과 경험, 낙후된 장비 및 통신, 명확하지 못한 지휘통제체계 등의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적 경험은 현대 한미 해군 협력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첫째, 양국 해군 간의 원활한 상호 운용성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보장하기 위해 광범위한 합동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정기적인 연합훈련과 교류 프로그램, 그리고 한미 해군 장병의 교육과정에 언어 및 문화 교육을 통합함으로써 과거 작전수행에 걸림돌이 되었던 언어 장벽과 작전상의 실수를 보완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상호 신뢰와 이해를 구축하여 양군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더욱 응집력 있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둘째, 함대 준비태세와 전투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해군 장비의 현대화 및 유지보수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노후되고 유지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함정으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이 직면했던 과거를 감안할 때, 현대적 협력에는 기술 업그레이드와 최첨단 장비 제공에 대한 지원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와 같은 작전 모호성과 외교적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명확한 지휘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통합된 지휘 프로토콜은 특히 민감하거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조율된 대응과 전략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미 해군은 과거의 교훈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안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더욱 탄력적이고 유능한 해양 동맹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The ROKN and Coalition Naval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Jihoon Yu and Erik French
The Republic of Korea Navy (ROKN) played a vital role during the Korean War as part of US-led coalition naval operations. It was able to contribute significantly to the allied war effort due to its inshore capabilities, local knowledge, and morale.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ROKN faced major challenges as a newly developed navy, particularly with regard to its equipment, training, communications, and command and control.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in 1950, the ROKN was still in its early stages. It had evolved out of the Joseon Maritime Association, established in 1945, and the Korean Coast Guard, founded in 1946. It included 6,624 sailors and 35 vessels, mostly small US and Japanese minesweepers with a few recently-purchased US submarine chasers. As the war progressed, this small fleet expanded dramatically; by the signing of the armistice it included over 14,000 men and 57 vessels which included new US patrol frigates, torpedo boats, and landing craft. Throughout the conflict, it operated under the authority of the US Commander Naval Forces, Far East and was organized as a task group under the United Nations Blockade and Escort Force.
The ROKN played an important role throughout the conflict as part of the US-led United Nations coalition. In particular, it was a key part of coalition efforts to enforce a blockade against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Later in the war, it was also integrated into UN minesweeping effort along the coast. Finally, it also participated in guerilla raids, efforts to control island outposts along the Korean coast, and even occasional coastal bombardment.
In these roles, the ROKN offered a number of important advantages to the coalition. First, ROKN forces filled an important niche, providing small vessels capable of inshore operations. Korea’s coastlines are often rugged and shallow, making it challenging for larger US Navy vessels to operate close to shore. The bulk of ROKN craft were light with fairly shallow drafts, however, especially when compared with the larger surface combatants employed by the US. This meant that the ROKN could often reach where other coalition forces could not. This maneuverability was useful in several ways. It allowed ROKN craft to intercept enemy vessels that were hugging the coast, better enforcing the UN blockade. Furthermore, ROKN vessels could get closer to the shore to better identify targets for allied bombardment. Finally, the ROKN could play a key role in escorting, landing, supplying, or evacuating friendly guerilla forces along the coast or offshore islands. Overall, the ROKN’s ability to operate close to shore in challenging waters contributed to the success of the coalition’s naval effort.
Second, the ROKN provided the coalition with useful local knowledge. With its intimate familiarity with the local terrain, weather, and population, the ROKN was invaluable for intelligence gathering throughout the conflict. For example, ROKN personnel worked closely with US forces to secure the intelligence needed for MacArthur’s amphibious assault on Incheon. They were also frequently stationed aboard allied vessels where they could interview refugees and interrogate prisoners for intelligence.
Third, the ROKN’s personnel quickly earned a reputation for bravery and ingenuity despite their relative inexperience. US naval officers frequently reported that ROKN personnel were exceptionally proud, spirited, and adaptable with good morale despite their limited experience and equipment. Famously, on the second day of the war, the ROKS Baekdusan intercepted a DPRK transport headed toward Busan with six hundred troops on board. When she struggled to hit the transport amidst rough seas, the Baekdusan boldly pushed closer to the enemy despite the increased risk posed by the enemy vessel’s machine guns. When the Baekdusan’s three-inch gun malfunctioned, she maneuvered closer still to better engage the enemy with her other weapons. Ultimately, the Baekdusan took considerable damage but succeeded due to her bravery, sinking the DPRK transport and securing Busan.
Despite its important strengths and critical contributions to the war effort, the ROKN also had to cope many significant challenges. First, the ROKN often made due with limited, outdated, or poorly-maintained equipment. Most of the ROKN fleet were old US and Japanese vessels that were in poor condition and missing important communication and navigation equipment, sensors, refrigerated storage, and other vital gear. ROKN vessels experienced frequent mechanical failures which often left them unable to contribute to allied operations and required other coalition members to provide costly repairs. Lack of radar and fire control equipment also rendered ROKN forces less combat-effective in surface engagements. Finally, a lack of minesweeping gear and degaussing meant that the ROK could only provide limited support for allied minesweeping operations.
Second, ROKN personnel lacked extensive training and experience when the war broke out. Initially, ROKN midshipmen were taught only briefly for two years at the ROK’s new Naval Academy. Enlisted recruits, meanwhile, were instructed in the basics of following orders and maintaining discipline but little else. Most personnel lacked any combat experience at sea. Ultimately, this meant that the ROKN struggled with tactical and technical missteps throughout the conflict. In one fairly egregious example, during the coalition evacuation of Heungnam port in December of 1950, a ROKN transport loaded with thousands of Korean refugees ran onto a line and was damaged. The vessel was freed and repaired. It then almost immediately fouled its shafts again and was unable to depart. The many refugees onboard desperately needed water and food at this point; several died as they waited for resupply.
Third, communication between the ROKN and coalition forces often proved challenging. Perhaps most problematically, the partners had to confront significant language barriers. Few ROKN officers could speak English and few US Navy officers could speak Korean. Identification and recognition of ROKN vessels also at times proved problematic for allied navies. On several occasions, miscommunication ended in fratricide. Only a few days into the war, on June 29, 1950, the USS Juneau detected a ROKN vessel operating near Samcheok. The Juneau had been told that all ROKN vessels had moved south of the 37th parallel and the ROKN vessel was not flying the ROK flag. As a result, the Juneau opened fire on the ship, destroying it and killing eight Korean sailors.
Finally, the ROKN encountered challenges with respect to command and control over the course of the war. Although the ROKN was placed under the authority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this command structure did not always function as planned. In particular, problems emerged when Japanese fishermen began to violate ROK President Rhee’s newly-declared ROK-Japan maritime border. Despite having turned over the command of Korea’s armed forces to the United Nations Command, Rhee repeatedly circumvented CTF 95 to order the seizure of Japanese fishermen, prompting several serious diplomatic incidents with Japan which the US had to defuse.
We can look to the ROKN’s experience for examples of the types of strengths and weaknesses which a small, developing navy may exhibit as part of coalition operations. On the one hand, it was able to leverage useful inshore capabilities, local knowledge, and a fierce fighting spirit to great effect. On the other hand, it faced serious deficiencies in terms of training and experience, equipment, communications, and command and control.
The historical experience of the Republic of Korea Navy (ROKN) during the Korean War highlights the need for a multifaceted approach to contemporary ROK-US naval cooperation. First, it is crucial to invest in extensive joint training programs to ensure seamless interoperability and effective communication between the two navies. Language barriers and operational missteps that plagued past operations can be mitigated through regular joint exercises, exchange programs, and the integration of language and cultural training into the curriculum for both ROKN and US Navy personnel. These efforts will build mutual trust and understanding, enabling both forces to operate more cohesively in high-stress situations.
Second, modernization and maintenance of naval equipment should be prioritized to ensure fleet readiness and combat effectiveness. Given the historical challenges faced by the ROKN with outdated and poorly maintained vessels, contemporary cooperation must include support for technological upgrades and the provision of state-of-the-art equipment. Additionally, establishing robust and clear command structures is essential to prevent operational ambiguities and diplomatic conflicts, as seen during the Korean War. Unified command protocols will facilitate coordinated responses and strategic alignment, particularly in sensitive or high-stakes scenarios. By addressing these areas, contemporary ROK-US naval cooperation can leverage the lessons of the past to build a more resilient and capable maritime alliance capable of addressing present and future security challenges.
- 약력
유지훈 중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미국 해군 잠수함작전과정(ASW)을 수료했으며, 미국 해군대학원에서 안전보장학 석사 및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미 학술교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잠수함 장교로 해군본부 미래혁신연구단 전략개념연구담당과 전평단 미래전개념담당을 거쳐 해군사관학교에서 군사전략학 교수로 근무했다. 현재는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국방전략연구실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Erik French교수는 프록포트 뉴욕주립대학 국제학 담당 부교수 겸 이사로, 시라큐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는 『해군 전쟁 대학 평론(Naval War College Review)』, 『분기별 전략 연구(Strategic Studies Quarterly)』, 『아시아 정책(Asia Policy)』 등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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