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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 Periscope

KIMS Periscope 제52호

아세안의 ‘남중국해 중재판정’ 대응과 향후 방향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재현

한국시간으로 지난달 12일 저녁에 드디어 중국 9단선을 포함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국제중재재판의 판결이 공개되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예상되었던 것처럼 이 판결은 문제를 제기한 필리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은 (1) 중국이 주장하는 9단선이 역사적 근거가 없으며, (2) 남사군도의 어떤 지형도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자격이 없고, (3) 전통적 어업권은 인정되어야 하며, (4)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등으로 인해 중국이 환경오염을 초래했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체적으로 중국에게 매우 불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판결은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2009년부터 동남아/미국과 중국 사이에 지속적으로 고조되어왔던 갈등의 한 마침표이자 남중국해 갈등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꼭지점이 될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 중국은 노골적 불만을 드러내고 판결 결과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미국과 일본 등 중국과 경쟁하는 국가들의 음모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미국·호주·일본을 비롯해 중국과 남중국해 문제에서 대척점에 섰던 국가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서 환영일색이며, 이를 이용해서 중국을 더욱 압박할 태세다. 일본은 앞장서 G7 정상이 이번 판결을 환영하는 성명을 내도록 주도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정작 동남아 국가들은 조용하다. 물론 동남아 국가들도 이번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는 했는데, 이 성명들에서 읽히는 그들의 입장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브루나이·캄보디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미얀마·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 등 라오스를 제외한 아세안 9개국이 이번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가장 강한 어조는 직접 당사자인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나온다. 이 두 국가는 이번 판결을 적극적으로 ‘환영’(welcome)했다. 그 다음으로 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얀마는 이번 판결에 ‘유의’(takes note)한다는 입장이었고, 인도네시아·태국·브루나이의 경우 판결 이후 성명에서 국제중재재판 판결 자체를 언급하지 않은 채, 남중국해 문제의 평화적 해결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친중적이라고 알려진 캄보디아는 남중국해 문제 관련 당사자가 아니므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성명을 내면서 다시 한 번 남중국해 문제는 아세안의 문제가 아닌 관련 당사국의 문제라는 중국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측면은 이러한 국가별 차이가 아니라 국가 간 유사성이다. 중재재판 결과를 환영하든, 이 판결에 유의하든, 아니면 판결 자체를 언급하지 않든 결국 모든 국가의 성명은 대화를 통한 남중국해 문제의 평화적 해결, 당사국의 ‘자제’(restraint)로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하면, 이번 판결 이후 동남아 국가들의 성명이 보여주는 바는 조속히 중재재판으로 인해 높아졌던 갈등과 긴장이 가라앉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중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미국·일본 등의 국가와 달리 동남아 국가들은 ―심지어 필리핀·베트남마저도― 이번 판결을 계기로 중국을 더 강하게 압박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번 판결로 이미 입지가 좁아진 중국을 더욱 몰아세우는 전략이 경제적으로나 안보측면에서 동남아 국가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매우 실용적인 판단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국민국가 수립이후 냉전과 탈냉전을 거치면서 개별 국가 차원에서나 아세안 집단적 차원에서나 실리와 실용 위주의 대 강대국 외교 노선을 걸어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국가 이익과 생존이고, 이를 위해 때로는 자기모순적으로 보이더라도 강대국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줄타기를 해왔다. 모든 강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모든 강대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번 국제중재재판 판결이 나온 이후 아세안은 객관적으로는 그 어떤 국가들보다 강력하게 판결을 환영하고 중국을 몰아세워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판결 직후 아세안의 실제 행동은 중국과의 실질적 관계와 실용적 고려에 바탕해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의식하는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다.

이재현 박사(jaelee@asaninst.org)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후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남아 국내 정치 및 아세안 국제관계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현재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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