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S Periscope 제425호
벼랑 끝에서 멈춰 선 호르무즈, ‘새로운 게임의 룰’과 한국의 주체적 생존 전략
중동의 지정학적 단층이 다시 한번 거칠게 요동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전면전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 파국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극적인 2주간의 휴전이 성사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모든 교량과 발전소를 단 4시간 만에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경고한 당일 오후 8시 최후통첩 시한이 임박한 가운데 이루어진 아슬아슬한 타결이었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대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양국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으며, 이 불안한 휴전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기존의 국제 질서가 붕괴하고 있다는 서늘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번 위기에서 드러난 미국의 대이란 접근법은 철저히 ‘최고 권력자의 직관’과 ‘미국 우선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 및 정보기관 전문가들의 객관적인 분석이나 만류를 배제한 채, 개인적 판단에 의존하여 전쟁과 협상을 주도하는 하향식(top-down) 의사결정 구조를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결정에 이견을 제시하는 군 고위 장성들과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물러나기도 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민간 인프라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겠다는 위협을 서슴치 않았고, 이는 유럽연합(EU)과 유엔, 그리고 국제형사법 전문가들로부터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전쟁 범죄라는 강력한 비판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미국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도 협상의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이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초기의 거창한 군사적 목표와 달리,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자 ‘끝없는 전쟁(forever wars)’에 반대하는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MAGA) 내부에서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결국 국내 여론의 악화와 유가 상승에 대한 부담감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출구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이번 작전을 통해 “이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언하며 미국이 이란의 농축 우라늄을 직접 거둬들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체면을 살린 채 중동에서 발을 빼려는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의 파상 공세 앞에서도 놀라운 전략적 인내와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다. 가자지구와 레바논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도한 일시적 휴전이 결국 전술적 함정에 불과했다는 뼈아픈 교훈을 바탕으로, 이란은 미국의 15개 항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 이란은 영구적인 전쟁 종식, 1차 및 2차 제재의 전면 해제, 우라늄 농축 권리 인정,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의 휴전, 그리고 전쟁 피해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는 10개 항의 독자적인 종전안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이란은 이번 2주간의 휴전 타결 직전, 건강 이상설이 돌았던 실세 모즈타파 하메네이가 막후에서 전령을 통해 협상단에 합의를 지시하는 등 치밀하게 위기를 관리하고 있다며 이란 지도부의 굳건한 통제력을 주장하고 있으며, 핵심 시설이 더 추가적으로 공격을 받을 경우 중동 전체를 타격하겠다는 보복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도출될 가장 유력하고도 우려스러운 시나리오는, 확고한 평화 협정 없이 미국이 일방적인 승리를 선언하고 철수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결국 호르무즈 해협의 통제권이 고스란히 이란의 수중에 남게 됨을 의미한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이란 접근법이 전통적인 동맹 보호나 국제 해상로의 안정 유지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국의 실익만을 좇는 ‘거래 중심적(transactional) 전략’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와 달리 중동 에너지 의존도가 현저히 낮아진 미국은 더 이상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며 호르무즈 해협의 평화를 지키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원유 자원을 국가 안보나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국부 증진과 직접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하나의 잠재적 경제 기회로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해협의 근본적인 안전 보장은 방기한 채 자국의 단기적 실리만 챙기고 일방적으로 발을 뺄 경우, 이란의 통항료 부과와 해상 운송로 교란이라는 치명적인 경제적 후폭풍은 호르무즈 해협에 국가 경제의 생명줄을 대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오롯이 떠안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 던지는 가장 무겁고 통찰력 있는 함의다. 이란의 10개 항 제안에는 온전히 해협을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재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로부터 ‘통행료(fees)’를 징수하는 새로운 안전 통항 프로토콜이 포함되어 있다. 전체 원유 수입의 약 70%를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국가 경제의 목줄이 타국의 재건 비용 청구서에 볼모로 잡히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될 수 있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는 26척의 한국 선박이 머물고 있으며, 2주간의 임시 휴전이 종료되는 시점에 맞춰 이란이 본격적으로 막대한 통행료를 부과할 것이라는 긴급한 경고가 현지에서 나오고 있다. 당장 이 2주의 골든타임 안에 우리 선박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단기적 대책이 시급하다. 그러나 한국은 호르무즈의 이 같은 지정학적 지각 변동에 다음과 같이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첫째, 안보 및 경제의 복합 위기에 대비한 독자적인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가 절실하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을 담보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해준다는 전제하에 움직여왔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 이익 중심의 정책으로 선회하거나 호르무즈 해협의 위기관리를 유럽 및 아시아 국가들에 떠넘길 경우, 한국은 국가 경제의 생명선인 에너지 수송로를 스스로 방어해야 하는 전례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은 이란이 통항료를 요구하는 새로운 규약(프로토콜)이 고착화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에너지 도입 비용의 구조적 상승과 공급망 교란에 대비하여 중동 외 지역으로의 에너지 수입 다변화와 재생에너지 전환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둘째, 진영 논리를 넘어선 다층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중동 다자 외교가 필요하다. 미국과 이란의 대치는 어느 일방의 승리보다는 무질서한 현상 유지나 확전의 일상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한국은 한미 동맹이라는 굳건한 안보의 축을 유지하면서도, 역내 분쟁 중재에 나서고 있는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주요 지역 강국들과의 다자 외교 채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특히 미국의 인프라 폭격 위협이 국제법 위반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동맹국의 노선에 맹목적으로 동조하기보다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을 존중하는 균형 잡힌 스탠스를 취해야 장기적인 국익을 보호할 수 있다.
셋째, 국가 경제의 젖줄인 해상교통로(SLOC)를 선제적으로 보호하고 방어할 수 있는 독자적인 해군력 강화와 국제 해양 안보 협력이 필수적이다.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에서의 위기는 단순한 물류 정체를 넘어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안보 위기로 직결된다. 따라서 한국은 연·근해 방어 중심의 기존 전략에서 탈피하여, 대양에서도 우리 선박을 독자적으로 보호하고 해양 분쟁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기동함대 전력을 조기에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상, 수중, 항공 전력을 포함하는 첨단 해군력을 확충하여 ‘대양해군’으로서의 역량을 실질화해야 한다. 동시에 다국적 연합해군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국제 해양 안보 작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제법에 기반한 ‘자유 항행의 원칙’을 수호하는 책임 있는 해양 국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이는 동맹의 안보 부담을 나누는 역할을 넘어, 유사시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켜내는 가장 확실한 물리적 담보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금의 호르무즈 위기는 한국에게 ‘미국의 패권이 보장하던 값싸고 안전한 중동 에너지 시대’의 실질적인 종언을 알리는 매서운 경고음이다.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국은 더 이상 상황이 안정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관찰자일 수 없다. 급변하는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외교와 에너지 안보를 융합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국가 생존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할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 약력
원태호 소장은 경기대학교 안전보장학과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안보정책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한민국 국방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해군사관학교 제32기로 졸업했다.
군 경력으로는 해군제3함대사령관, 해군사관학교장, 합동참모차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전역 후에는 국방과학연구소 자문위원과 경남대학교 초빙교수 그리고 세종대학교 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현재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 국내외 추천자료
- Gavin Butler, Toby Mann, Patrick Jackson. “Why the Strait of Hormuz matters so much in the Iran war” BBC, April 6, 2026.
- Samantha Gross, Caitlin Talmadge, and Melanie W. Sisson. “Why Iran’s Disruption of the Strait of Hormuz Matters.” Brookings, March 19, 2026.
- Nitya Labh. “Conflict in the Strait of Hormuz Is Spilling into the Indian Ocean.” Chatham House, March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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